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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송시 100편 - 제4편] 황동규 '즐거운 편지'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황동규 시인은 올해로 등단 50주년을 맞는다. 반 세기 동안이나 그는 우리말을 정갈하게 빚었고 우리말의 숨결을 세세하게 보살펴 고아(高雅)하게 했다. 놀랍게도..

[애송시 100편 - 제3편] 이성복 '남해 금산''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돌 속에 묻힌 한 여자의 사랑을 따라 한 남자가 돌 속에 들어간다면, 그들은 돌의 연인이고 돌의 사랑에 빠졌음에 틀림없다. 그 돌 속에는 불이 있고, 목마름이 있고, 소금이 있고, 무심(無心)이 있고, 산 같은 숙명이 있었을 터. 팔다리가 하나로 엉킨 그 돌의 형상을 '사랑의 끔찍한 포옹'이라 부를 수 있을까?그런데, 그런데 왜, 한 여자는 울면서 돌에서 떠났을까? 어쩌자고 해와 달은 그 여자를 끌어주었을까?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한 남자를 남긴 채. 돌 속..

[애송시 100편 - 제2편] 김수영 '풀'

풀이 눕는다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풀은 눕고드디어 울었다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다시 누웠다풀이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발목까지발밑까지 눕는다바람보다 늦게 누워도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바람보다 늦게 울어도바람보다 먼저 웃는다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김수영 전집 1' (민음사) 풀은 이 세상에서 제일로 흔하다. 풀은 자꾸자꾸 돋는다. 비를 만나면 비를 받고 눈보라가 치면 눈보라를 받는다. 한 계절에는 푸르고 무성하지만, 한 계절에는 늙고 병든 어머니처럼 야위어서 마른 빛깔 일색이다. 그러나 이 곤란 속에서도 풀은 비명이 없다. 풀은 바깥에서 오는 것들을 긍정한다. 풀은 낮은 곳에서 유독 겸손하다. 풀은 둥글게 휘고 둥글게 일어선다..

[애송시 100편 - 제1편] 박두진 '해'

시평 쥐띠 해가 밝았다. 현대시가 출발한 지 100년이 되는 해가 밝았다. 대통령 당선자는 근심과 탄식의 소리가 멈춘 ‘생생지락(生生之樂)’의 세상을 만들겠다고 했다. 어둠으로 점철된 현대사 속에서 우리 시는 시대의 고통을 살라먹고 ‘청산(靑山)의 해’를 예감하는 첨병의 정신을 놓지 않았다.‘해’ 하면 떠오르는 시, 그것도 ‘새해’ 하면 떠오르는 시, 현대시에서 드물게 희망으로 충만한 시, 중학교 1학년 교과서에서 읽게 되는 시가 바로 박두진의 ‘해’이다. 1946년에 발표된 이 ‘해’가, 해방을 염원하던 해든 해방의 기쁨을 담은 해든, 솟지 않는 해를 향한 촉구든 솟고 있는 해를 향한 경이든 무슨 상관이랴. 그 해가 여전히, 지금-여기에서, 이글이글 솟구치고 훨훨훨 분방하고 워어이 워어이 불러모으고 있..

김종삼의 시

https://blog.naver.com/j_8028/222809251326 김종삼 4 / 시(詩) 8편1 어부(漁夫) 바닷가에 매어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blog.naver.com 시가 어려운 입지에 처해 있다는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나돌았지만 애당초 시와 시인은 세상의 주류이거나 조명을 받는 위치에 있지 않다. 물질 사회에서 시와 시인의 ‘별 볼일 없음’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이다. 시인은 언제나 음지에 존재하며, 추수를 마친 뒤 쓸쓸한 밭이랑에서 떨어진 이삭을 줍는 노인의 늙은 연민과 낡은 우수와 같다.잘나가는 일부 시인이 없지는 않겠으나 대부분의 시인은 ‘마이너리그 소속’이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2만 명도 넘는다는 시인 가운데 줄잡아 98..

관심사/시 2024.09.16

저 강이 깊어지면 / 이승하

바람 다시 실성해버려땅으로 내리던 눈 하늘로 치솟는다엊그제 살얼음 얼었던 강오늘은 더 얼었을까 얼마만큼더 두터워졌을까깊이 모를 저 강의 가슴앓이를낸들 알 수 있으랴눈 … 눈 닿는 어디까지나눈이 흩날려 세상은 자취도 없다길도 길 아닌 것도 없는 천지간에인도교도 가교도 없는 막막함 속이 반자받은* 눈발을 뚫고서누추한 마음으로 매나니로**강 저쪽 가물가물한 기슭까지오늘 안으로 가야만 하는사람들이 있다 모질기만 한 시간저녁 끼니대는 왜 이렇게 빨리 오며밤은 또 왜 이렇게 빨리 오는 것인가강은 그저 팔 벌려 온종일받아들이고만 있다 쌓이는 눈을눈물을, 사랑과 미움의 온갖 때를강 저쪽 기슭에는살 비비며 만든 식속들사랑과 미움으로 만나는 식솔들이 있기에가야 하는 것이다 날 새기 전에참 많은 죽음을 저 강은지켜보았으리 ..

관심사/시 2024.09.15

지금 세상의 좋은 시는? 좋은 문예지는? / 이승하

시집이 여전히 많이 간행되고 있다. 흔히 1980년대를 시의 시대라고 일컫는다. 군사독재가 자행되는 과정에서 언론탄압이 자심하였고, 무크지로는 충족될 수 없는 저항적 언어에 대한 욕구가 시의 융성을 가져왔다. 지금도 나는 이성복, 황지우, 박남철 그리고 김남주, 박노해, 백무산, 김신용의 시집을 펼쳐 들면 전율을 느낀다. 그 무렵에는 문학이, 특히 시가 역사와 사회와 문화의 한복판에서 지진의 진앙 역할을 하였다.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최근에 모 신문사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서 이런 말을 했다.“대부분의 독자는 시가 지나치게 난해하거나(혹은 현학적이거나), 지나치게 길거나, 운문이 아니라 산문조면 골치가 아파 기피하게 됩니다. 그런데 유명한 출판사에서 낸 시집에 그런 시가 유독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

강경주의 시론 (펌)

시조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다가 시조시인 강경주의 [현대시조, 어떻게 쓸까?] 글 내용 중 시론 부분에서 느끼는 점이 많아 일부를 퍼 담아왔다. 출처 : https://cafe.naver.com/yeegangsan/11380사람은 태어남과 동시에 본디 온전한 생명력을 어느 정도 상실하게 된다고 한다. 분별심이 생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더 많은 능력을 잃게 된다고, 그것이 곧 적응이라고 탈무드에서도 그리했듯이, 성경에서는 에덴의 동산에서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분별심(선이니 악이니 하는)이 생겨 마침내 완전한 삶을 상실하고 고통의 삶이 시작되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불가에서는 알음알이와도 같은 분별심을 버리는 것을 해탈의 기본으로 삼고 있다. 분별심은 언어에 의해 발생하는 관념이다. 우리들은 언어로..

관심사/시조 2024.09.15

행복에 필요한 또 하나의 P

인생이란, 각기 저마다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이 길을 행복하게 걷기 위해 우리에게 '3P'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첫째는 '평안(Peace)'입니다.과도한 욕심에서 벗어나 마음의 고요를 유지하는 것입니다.두 번째는 '실천(Practice)'입니다.지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차근차근 실현해 가는 것입니다.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인내(Patience)'입니다.어떤 상황에서든 흔들림 없이 꾸준히 나의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그러나 정말 이것만으로 충분한 것일까요.호주 퍼스의 시립미술관에는 1889년 그려진 'Down on His Luck'이란 작품이 있습니다. 그림 속 사내는 숲길에 앉아 모닥불을 피우며 쉬고 있습니다.그의 뒤편으론 그가 하루 종일 힘겹게 걸었을 좁다란 길이 보입니다.이제 그는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