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들만 모른 체하면
신문은 이리저리 접히는 보자기,
나는 신문이 언론일 때보다
쓸쓸한 마른 보자기일 때가 좋다
그 신문지를 펼쳐놓고 일요일 오후가
제 누에발톱을 툭툭 깍아 내놓을 때가 좋다
어느 날 삼천원 주고 산 춘란 몇 촉을
그 활자의 만조백관들 위에 펼쳐놓고
썩은 뿌리를 가다듬을 때의 초록이 좋다
예전에 파놓고 쓰지 않는 낙관 돌들
이마에 붉은 인주를 묻혀
흉흉한 사회면 기사에 붉은 장미꽃을
가만히 눌러 피울 때가 좋다
아무래도 굴풋한 날 당신이
푸줏간에서 끊어온 소고기 두어 근
핏물이 밴 활자들 신문지 째로 건넬 때의 그 시장기가 좋다
이젠 신문 위에 당신 손 좀 올려보게
손목부터 다섯 손가락 가만히 초록 사인펜으로 본떠놓고
혼자일 때
내 손을 가만히 거기 대보는 오후의 적막이 좋다
시집 〈그대를 바라는 일이 언덕이 되었다〉 (2024) 중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신문을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말을 들은 적 있습니다. 신문지들을 야채 보관할 때 쓰고, 유리창 닦을 때 쓰고, 비에 젖은 신발에 끼워넣을 때 쓰곤 했는데요. 이 시를 읽는 동안 그때에도 살아있었을 활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뒤늦게 생겨, ‘활자들만 모른 체 하면’ 첫 행이 자꾸만 되뇌여집니다.
편집과 교정 그리고 글쓰기에 대한 자부심으로 탄생한 글들. 목숨이 하루뿐일지도 모를 신문지 위에서 녹록치않은 여유를 부려보고 있는 시인의 하루가 눈에 선합니다. 신정민 시인
출처 : https://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25052017590413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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