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이 우물처럼 깊다고 말할 때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노래가 좋아질 때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은 받침을 물끄러미 볼 때
다르다와 틀리다를 혼동할 때
소유를 자유로 바꾼 사람을 잊어버릴 때
슬픔을 이기려고 꽃 속에 얼굴을 묻을 때
목 놓은 바람 소리 나를 덮칠 때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애절한 가사를 쓸 때
절망이 나를 키웠다고 고백할 때
먼 것이 있어서 살아있다고 중얼거릴 때
남의 고통 앞에 ‘우리’라는 말을 쓰고 후회할 때
흰 구름으로 시름을 덮으려고 궁리할 때
쓰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쓸 때
나는 낯설다
-시집 〈몇 차례 바람 속에서도 우리는 무사하였다〉 (2024) 중에서
존재의 불가피한 근원적 고독과 슬픔을 눈부신 서정의 언어로 승화시키는 순간들. 문득 앞만 보고 달려온 생을 뒤돌아보며 미처 따라오지 못한 영혼을 기다려주는 시인의 순간들을 통해 부족하기만 한 저를 하나씩 짚어보게 됩니다.
상실이며 절망이고 슬픔이며 울음인 삶. 그러나 삶이 준 상처가 저렇듯 진창에서 절창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시처럼 빛날 수 있는 것이라면 견딜 만한 것일까요.
시 쓰기가 세상에 진 빚을 갚는 것이며, 목숨에 대한 반성문이며, 삶과 세상의 진실을 말하는 데 시보다 충분한 것은 없다던 노시인의 고백에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60년 동안 써왔던 시가 살기 위해서였다는 시인의 말에 다시 숙연해집니다. 순간순간 낯선 자신을 안아주는 일. 노시인의 겸허한 문장들이 죽비처럼 어깨를 내려칩니다. 신정민 시인
출처 : https://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25051317544549666
'관심사 >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문 / 유종인 (1968~) (0) | 2025.05.21 |
---|---|
현재는 이렇게 지나간다 / 차도하 (1999~2023) (0) | 2025.04.30 |
봄의 정치 / 고영민 (1968~) (0) | 2025.03.05 |
연금술 / 김욱경(1936~2002) (0) | 2025.02.23 |
[시인의 詩 읽기] 간결하고 아름다운 걸음 (0) | 2025.0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