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에 익숙해진 나이
뒤적이는 일이 자주 생긴다
책을 읽어가다가 지나온 페이지를 뒤적이고
잃어버린 물건 때문에
거듭 동선을 뒤적이고
외출복이 마땅치 않아 옷장을 뒤적인다
바람이 풀잎을 뒤적이는 것을 보다가
햇살이 이파리를 뒤적이는 것을 보다가
달빛이 강물을 뒤적이는 것을 보다가
지난 사랑을 몰래 뒤적이기도 한다
뒤적인다는 것은
내 안에 너를 깊이 새겼다는 것
어제를 뒤적이는 일이 많은 자는
오늘 울고 있는 사람이다
새가 공중을 뒤적이며 날고 있다
이재무 시인
충남 부여 출생
1983년 《삶의 문학》으로 작품활동 시작
이육사 문학상 외 수상
시집 『즐거 운 소란』 외
현 방송대, 서울디지털대학 시 창작 강의, 《천년의 시작》 대표이사
얼마 전 어떤 남편이 출근하면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자신의 핸드폰으로 아내에게 전화를 해 자신의 핸드폰을 들고 내려오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 나이는 들고 망각은 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불안해 자신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뒤적여볼 때가 된 거다. 금방 있었던 물건이 보이지 않을 때 두리번거리다 자신을 의심하기도 하고, 친했던 초등학교 동창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며칠을 공공거리며 추억을 뒤적여본 적도 있다.
그런데 이재무 시인의 「뒤적이다」라는 시는 우리의 이 망각을 슬픔이나 불안으로 이끌지 않고 오히려 아름답게 미화시키고 있다. 그의 시에 나오는 '뒤적이다'라는 의미는 다층적이고 변증법적이며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책을 읽어가다가 지나온 페이지를 뒤적이고', '외출복이 마땅치 않아 옷장을 뒤적이'기도, '달빛이 강물을 뒤적이'거나 '지난 사랑을 몰래 뒤적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뒤적이다'라는 시의 의미가 고정되지 않고 창조적으로 변용되어 '사랑'의 개념으로 확장해가고 있다. 그리하여 시의 화자는 '자신의 사랑을 몰래 뒤적이는' 아름다운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그래서 시인은 말한다. '뒤적인다는 것은 내 안에 너를 깊이 새겼다는 것'이라고.
전종대현대시감상집 『사랑하라 두 번은 없다』 (경산인터넷뉴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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