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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에 산다 / 안현미

너럭바위 一石 2024. 8. 26. 11:20

극락은 공간이 아니라 순간 속에 있다 죽고 싶었던 적도 살고 싶었던 적도 적지 않았다 꿈을 묘로 몽을 고양이로 번역하면서 산다 침묵하며 산다 숨죽이며 산다 쉼표처럼 감자꽃 옆에서 산다 기차표 옆에서 운동화처럼 산다 착각하면서 산다 올챙이인지 개구리인지 햇갈리며 산다 술은 물이고 시는 불이라고 주장하면서 산다 물불 안 가리고 자신 있게 살진 못했으나 자신 있게 죽을 자신은 있다고 주장하며 산다 법 없이 산다 겁 없이 산다 숨만 쉬어도 최저 100은 있어야 된다는데 주제넘게도 정규직을 때려치우는 모험을 하며 시대착오를 즐기며 산다 번뇌를 반복하고 번복하며 산다 죽기 위해 산다 그냥 산다 빌라에 산다

그런데, 어머니는 왜서 자꾸 어디니이껴 하고 물을까 

 

안현미(1972~)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시멘트로 사방에 벽을 친 회색 빌라에 모여 혼자인 듯 함께 산다. 옆집, 앞집, 윗집, 아랫집이 내는 왁자한 기척이나 비명들을 함께 들으며 “숨죽이며” 산다. 커다란 울음통 같은 빌라에서 다세대가 한 덩어리의 가족인 듯 모여 산다.

 

시인에게 극락은 “공간이 아니라 순간” 속에 있다. 극락과 지옥은 순간순간 일어나는 마음에 있는 것 아닐까. 우리는 번뇌의 집을 가로로 세로로 한 칸씩 올린 다세대주택에서 거미줄에 걸린 이슬을 진주라 착각하며 산다. 매일 착각을 이불처럼 덮고 산다.

 

살기 위해 더 높은 허공에 올라가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디며 거미줄을 한 줄 한 줄 간신히 잇는다. 우리가 매일 짓고 부수는 번뇌의 빌라. 존재들의 모퉁이를 조금씩 갉아먹으며, “번뇌를 반복하고 번복하며” 우리는 산다. 어머니가 시인에게 전화해 “어디니이껴” 자꾸만 물어도 대답할 수 없던 빌라에서 발버둥치며 산다. 우리는 모두 안개처럼 산다.

 

이설야 시인

 

https://v.daum.net/v/20240825203927361

 

안현미(1972~ ) 강원도 태백에서 태어나 서울산업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으며, 2001년 문학동네에 신인상을 받으면서 등단했다.

 

태백에서 유년기를 보내다가 여섯살 즈음에 아버지에 의해 새엄마에게 보내어졌다. 가난해서 서울여상에 진학했고, 졸업 후 대기업 사무보조원으로 취직해 살다가 20대 후반에 서울산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야간반에 등록했고, 사무보조원 시절 아현동 월세방에서 살면서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김경주, 김민정과 같은 불편동인 소속이다.

 

주름진 동굴에서 백 일 동안 마늘만 먹었다지

여자가 되겠다고?

 

백 일 동안 아린 마늘만 먹을 때

여자를 꿈꾸며 행복하기는 했니?

 

그런데 넌 여자로 태어나 마늘 아닌 걸

먹어본 적이 있기는 있니? ”

 

— 곰곰, 안현미

 

시집 이별의 재구성으로 2010년 제28회 신동엽창작상을 받았다. 심사위원회로부터 생에 대한 아픔을 때로는 재치 있는 유머로, 조금은 삐딱한 시선으로 담아내면서 현실의 불우를 환상으로 채색해가는 이 시인의 시세계는 우리의 감성을 따뜻하게 위로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손택수는 발문에서 늘 한쪽으로 조금 기우뚱해 있는 사선(/)을 닮았다. 현실의 비참을 환상적 기법을 통해 위무하는 것이 그녀의 시가 지닌 매력이라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