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사/시

저 강이 깊어지면 / 이승하

너럭바위 一石 2024. 9. 15. 23:03

바람 다시 실성해버려
땅으로 내리던 눈 하늘로 치솟는다
엊그제 살얼음 얼었던 강
오늘은 더 얼었을까 얼마만큼
더 두터워졌을까
깊이 모를 저 강의 가슴앓이를
낸들 알 수 있으랴


눈 … 눈 닿는 어디까지나
눈이 흩날려 세상은 자취도 없다
길도 길 아닌 것도 없는 천지간에
인도교도 가교도 없는 막막함 속
이 반자받은* 눈발을 뚫고서
누추한 마음으로 매나니로**
강 저쪽 가물가물한 기슭까지
오늘 안으로 가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질기만 한 시간


저녁 끼니대는 왜 이렇게 빨리 오며
밤은 또 왜 이렇게 빨리 오는 것인가
강은 그저 팔 벌려 온종일
받아들이고만 있다 쌓이는 눈을
눈물을, 사랑과 미움의 온갖 때를
강 저쪽 기슭에는
살 비비며 만든 식속들
사랑과 미움으로 만나는 식솔들이 있기에
가야 하는 것이다 날 새기 전에


참 많은 죽음을 저 강은
지켜보았으리 다받아들였으리
눈발에 아랑곳하지 않고 저 홀로 깊어지는 강
침묵으로 허락했던 시간이 쌓여
기나긴 저 강 이루었을 터이니
모든 삶은 모든 죽음보다
어렵다 아니, 어렵지 않다


*반자받은 : 몸시 노하여 펄펄 뛰는
**매나니로 : 맨손으로, 맨밥으로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김천에서 성장했다.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동 대학원 졸업.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소설로 당선했다.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냈다.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등을 출간했다.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출처 : 문학인신문(http://www.munhaki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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