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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인정하지 않는 4·3 생존자, 재일조선인 시인 김시종의 삶
일본 도쿄(4월20일)와 오사카(4월21일)에서 제주4·3 76주년 추도식이 열렸다. 올해 도쿄의 추도식은 재일조선인 시인 김시종의 강연과 현기영의 4·3 소설 〈순이 삼촌〉을 오페라로 창작한 ‘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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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다
기억에는 기억을 멀어지게 만드는
기억이 있다.
긴 세월 동안 뒤섞이고 쌓여서
그 순간순간이 또 다른 장면으로
변하기도 해서,
잠들 수 없는 밤의 모처럼의 잠을
방해하고 만다.
돌이켜 보면 또다시 똑같은
쫓기며 숨은 부들부들 떠는 꿈이다.
나한테는 기도할 수밖에 없는 마음의 짐이
씻을 수 없는 죄가 되어
웅크리고 있다.
혼자서 아버지를 묻은 어머니의
깊은 슬픔의 어둠 속에
합장을 한다.
줄지어 선 나를 숨겼기 때문에 당한
숙부의 억울한 죽음의 신음을 견디고
묵념을 한다.
동시에 나를 이끌어 입당까지 시킨 그가
찌부러진 얼굴로 숨이 끊어진 무참한 모습에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문다.
공양은 아니다.
기억에 시달리는 나를 위한
합장이다.
그래도 잠들지 못하는 밤은 있고
거듭 뇌리에 스쳐오는 것은
무언가의 그늘에서 떨고 있는
소년의 얼굴을 한 나 자신이다.
세월이 지나가면서 아득해지는 게 아니라
기억을 멀리하는 기억에 현기증이 나
기억 속에 4.3이 하나 하나
분해된 것이다.
여자가 웃고 있다.
요기에 홀린 귀신 같은 표정으로
눈가를 치켜 뜨고 웃고 있다.
참혹한 살육의 4.3 속
장비도 장엄한 토벌대 군경에게
양손을 크게 벌리고
껄껄 키득키득 웃기 시작한다.
부풀은 젖가슴도 하얗게 보이는
흘러내린 치마에 맨발의 여자.
마을 전체가 불타버려 젖먹이까지도 총격을 당한
교래리의 학살에서 혼자 남겨진
세 아이의 어머니가 그녀다.
백부의 제삿날 성내로 나왔기에
구제된 목숨.
살아남아 정신이 나간
메마른 목숨.
어떠한 기억도 그녀 앞에서는
웃음의 잔향으로 흩어진다.
미쳐 웃을 수밖에 없는 비탄함이 웃고 있다.
혼자 살아남은 나를 웃는 거다.
아무리 깨어 있고
귀를 파도
꿈은 전혀 나이를 먹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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