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빛
내가 사랑하는 동유럽 작가들처럼
고통이 빛이 되는
삶은 내 것이 아니기를 바랐다
한밤중 택시를 타고 달릴 때
문득 흘러나오는 슈베르트의 가곡처럼
죽은 시인과 죽은 외할머니가
함께 잠들어 있는 내 환한 다락방처럼
꿈에서도 손가락을 박는 재봉사의
잠과 밤처럼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비가 오고 눈이 내리는 것
모국어라는 이상한 공기처럼
시라는 이상한 암호처럼
환상의 빛
옛날 영화를 보다가
옛날 음악을 듣다가
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구나 생각했다
지금의 나보다 젊은 나이에 죽은 아버지를 떠올리고는
너무 멀리 와버렸구나 생각했다
명백한 것은 너무나 명백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몇 세기 전의 사람을 사랑하고
몇 세기 전의 장면을 그리워하며
단 한 번의 여름을 보냈다 보냈을 뿐인데
내게서 일어난 적 없는 일들이
조용히 우거지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눈 속에 빛이 가득해서
다른 것을 보지 못했다
단지 조금 이상한 / 문학과지성사, 2013.
환상의 빛
등 뒤에서 악령들이 내 긴 머리를 땋았다
희고 가녀린 손으로
입 속에서 허연 김을 내뿜으며
나는 손가락을 뻗어
뿌연 유리창 위에 밤의 다른 이름들을 써내려 갔다
겨울의 다른 이름들을 써내려 갔다
나의 다른 이름들을 써내려 갔다
창 밖으로 몽유병의 신부와 들러리들이 맨발로 흰 드레스를 끌며
나타났다 사라졌다
어두운 거리는 밤새 골목을 만들었다가 숨겼다
어째서 머리칼은 계속해서 자라고 창 밖의 폭풍은 멈추지 않는 걸까
등 뒤에서 악령들이 내 긴 머리를 땋는다
희고 빛나는 물을 뚝뚝 흘리며
낮은 중얼거림으로
어째서 이 밤에는 저 오래된 거리에는
내 몸 속에는 불빛 하나 켜지지 않는 걸까
예감으로 휩싸인 계절은 연속 상영되고
새들은 지붕 위에서 오래 잠들어 있다
감기약을 먹고 나는 다시 잠들겠지만
먼지는 밤 사이 도시를 또 뒤덮을 것이고
내가 잠들면 시작되는
이 겨울 밤의 자막은
내가 쓴 이름들과 기호들과 본 적 없는 빛의 알 수 없는 조합
나는 끝내 읽지 못한다
환상의 빛
긴 잠에서 깨어난 외할머니가
조용히 매실을 담그고 있다
긴 잠을 자고 있는 내가 깨어날 때까지
나는 차를 너무 많이 마셨나
눈물에 휩쓸려 바다까지 떠내려갔나
하루는 거대해지고
하루는 입자처럼 작아져 보이지 않는다
아픈 내 배를 천천히 문질러주듯
외할머니가 햇볕에 나를 가지런히 말린다
슬퍼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본 적 없는 신을 사랑해본 적도 있다
본 적 없는 신을 그리워해본 적도 있다
그저 외할머니의 치마 속으로 들어가
긴 겨울을 여행하고 싶었을 뿐인데
긴 잠에서 깨어난 내가 눈물을 참는 사이
밤하늘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이 내려오고 있다
저 눈이 녹으면 흰 빛은 어디로 가는가*
‘환상의 빛’이라는 제목의 시는 강성은의 첫 시집에도 수록되어 있고, 두 번째 시집에도 연작의 형태가 아닌 개별 시로 세 편이나 등장한다. 이 시들은 강성은의 시적 주체가 경험하는 어떤 기이한 시간들의 경험 혹은 계시의 순간들을 보여준다. “하루는 거대해지고/하루는 입자처럼 작아져 보이지 않는” 사이에서 “지금의 나보다 젊은 나이에 죽은 아버지를 떠올리고는/너무 멀리 와버렸구나” 생각하며 “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린다. “눈 속에 빛이 가득해서/다른 것을 보지 못”하는, ‘환상의 빛’을 만나는 순간들은 나의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시간 너머의 층위를 경험하는 순간이며, 그 순간은 종교적 뉘앙스를 갖는 계시의 순간이고, 동시에 시적인 마주침의 시간이다.
그 뒤로도 두 편을 더 썼다.
강성은(1973년~)
1973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2005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현재 ‘인스턴트’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8년 제26회 대산문학상 시 부문에 선정되었다.
시집 《Lo-fi》(문학과지성사, 2018),
《단지 조금 이상한》(문학과지성사, 2013),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창비, 2009)
'관심사 >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시 수목원에서 / 현택훈 (0) | 2024.07.29 |
---|---|
치자꽃 지는 저녁 / 오민석 (0) | 2024.07.27 |
김안 / 입춘, Mazeppa (0) | 2024.07.27 |
유령림 / 김안 (0) | 2024.07.27 |
장석주 시 모음 31편 (0) | 2024.07.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