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0 5

해변의 전문가 / 손음(1964~)

한 장씩 파도를 받아본다파도 속에 무엇이 들어있나일간지처럼 성실하게 배달되는 슬픔슬픔을 후벼파고 나면산문처럼 밀려오는 것들잠시 동안눈을 감았는데 생겨나는 노을어디든 번져나간다 사람들은 해변으로 와서웃고 떠든다웃고 떠드는 것만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다그들은 슬픔을 위로할 줄 아는 전문가 해안선이 뒤엉킨다오래 슬픔에 붙들려 슬퍼하다 보니슬픔도 내 몸에 살고 있는 장기(臟器)라는 생각속수무책날마다 나에게 슬픔을 갖다 바치는 것들슬픔도 무엇도 괜찮다 모래톱에사람들이 벗어두고 간발목이 쌓인다혹시라도 남아있는 슬픔을 모두 벗어두고 가는전문가들 시집 〈고독한 건물〉 (2025) 중에서 슬픔이란 감정은 우리를 힘들고 고통스럽게 하지만,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감정이기도 합니다.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과 겸손..

관심사/시 2025.10.22

이달균 (1957~ )

어느 날 홀연히 개마고원에 들어 / 이달균 한 점 바람이 될까 한 줌 빗물이 될까. 가야산 홍류동에 깃들고 깃들어 신화되어 떠나신 최고운 선생 따라 나 또한 이 땅 어드메서 홀연히 사라질까. 문득 일진광풍에 허튼 시나위 가락처럼 자취 없이 떠난다면 산 첩첩 험한 준령, 운총강 압록강 철철 여울지는 함경도라 길주 명천 개마고원이 어떠할까. 깊디깊은 골째기엔 날래고 용맹한 백두산 호랭이도 있으리니, 그 녀석 가리어 줄 한 그루 도래솔이 되어볼까. 울창한 고삿길 우뚝 선 키 큰 장승,팔자에 없는 천하대장군 복록이라도 누려볼까. 아서라, 세파에 찌든 몸을 입산이나 허하실까. 2019년 제4회 조운문학상 본상 수상작 1957년 경남 함안에서 출생했으며, 1983년 5인 시집..

관심사/시인 2025.10.08

이성복 (1952~ )

식탁 / 이성복 아이들이 한바탕 먹고 떠난 식탁 위에는 찢긴 햄버거 봉지와 우그러진 콜라 페트병과 입 닦고 던져놓은 종이 냅킨들이 있다 그것들은 서로를 모르고 가까이 혹은 조금 멀리 있다 아이들아, 별자리 성성하고 꿈자리 숭숭한 이 세상에서 우리도 그렇게 있다 하지만 우리를 받아들인 세상에서 언젠가 소리 없이 치워질 줄을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다 이성복 문학과지성사, 2013 1952년 6월 4일 경북 상주 출생. 서울대 불문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계명대 교수로 재직했다. 1977년 『문학과지성』에 「정든 유곽에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1982년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개인적 삶을 통해 확인한 고통스러운 삶을 보편적인 삶의 양상으로 확대하며 진실을 추구한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관심사/시인 2025.10.05

길 위에서 1 / 이병률(1967~)

길 가던 고슴도치가밤송이를 만나서 말했다이봐 그딴 가시 좀 치워주지 그래길 가는 데 방해가 되는구먼밤송이는 말이 없고그 옆에서 밤껍질을 갉작이고 있던다람쥐가 말했다너도 그 곤두세운 가시 좀 치워보지 그래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확인해보게고슴도치가 지나가고다람쥐도 사라지고길 위엔 알맹이 없는 밤송이만 남았다지나가는 바람에 밤송이가중얼거리는 말이 새어 나왔다내가 스스로 익어 벌어지기 전까진내 몸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던 것들이 시집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2024) 중에서 거리 어느 한 귀퉁이에 군밤장수 리어카가 등장하는 가을이 왔습니다. 부드러운 속살을 가진 밤들은 가시로 무장한 껍질을 벗겨낸 것이었지요. 이 시는 한 편의 동화를 보는 듯합니다만 시의 말미에 있는 밤송이의 일침에 통쾌하기도 ..

관심사/시 2025.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