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당사에 걸린 이승만‧박정희‧김영삼은 한국 보수의 적통이다. 더불어민주당의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전 대통령과 대비된다. 그런데 비상계엄으로 보수는 절멸의 위기에 처한다. 건국‧산업화‧민주화라는 세 개의 축은 튼튼한 안보와 평화에 기초하여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공산당까지 포용하는 가치 상대주의에 입각한 자유민주주의 일반 이론에 한계를 그으면서 공산당을 배척하는 한국적 자유민주주의를 구축한다.
타의에 의한 남북 분단이지만 그 결과 이 땅에 진보보다는 보수에게 더 많은 기회와 역할을 부여하였다. 이승만은 독재와 부정선거로 쫓겨났지만 건국에 기여했다. 박정희는 군사쿠데타로 집권했지만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춘궁기를 벗어나 산업화를 성공시켰다. 김영삼은 3당 야합으로 비난받았지만, 호랑이 굴속으로 들어가 문민시대를 열었다.
한국 보수는 여기까지다. 군사정변의 주역인 전두환·노태우는 거명조차 되지 않는다. 샐러리맨 신화를 창조한 이명박과 박정희의 유산을 계승한 박근혜는 부정부패로 영어의 신세로 전락했었다. 다급해진 보수는 이명박·박근혜를 구속시킨 문재인 정부 검찰총장을 대통령 후보로 영입했다.
진보의 아이콘인 김대중은 집권 프로그램으로 군사정변 주역인 김종필과의 DJP연합으로 집권에 성공했다. 노무현도 재벌 2세 정몽준과의 단일화로 개혁정치의 산실이 되었다. 덩샤오핑(鄧小平)의 흑묘백묘론(黑貓白貓論), 즉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목적 달성이 최우선이라는 방책의 실현이다. 그렇지만 안방을 통째로 내주지는 않았다. 김대중은 김영삼 키즈인 이인제를 영입했지만, 안방은 노무현이 지켰다. 김영삼은 민중당의 이재오·김문수를 비롯한 진보세력을 영입했지만, 보수의 가치를 잃지 않았다.
한국 보수의 실패는 자생력을 상실한 데에서 비롯된다. 스스로를 구원하고 치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보수의 가치가 사라진 자리에 한 줌 기득권에 안주하는 기회주의만 득실거린다. 건국과 산업화를 이어갈 자질과 능력도 보여주지 못한다. 시대가 바뀌었는데, 선대가 쌓아올린 과실에 집착하여 과거회귀적 동상‧기념관‧영화 만들기에 집착한다.
실존적 현실에 기반한 역사와 전통의 존중, 성장을 통한 발전은 보수의 소중한 덕목이다. 하지만 과거에 의탁해서는 성장도 발전도 없다. 보수가 지켜야 할 최고의 덕목인 자유와 민주는 사치스러운 장식물이 되었다. 파면된 전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그토록 강조하던 자유는 군대를 동원한 비상계엄 발동으로 허공 속에 날아가 버렸다. 자유는 다원성과 다원주의를 생명으로 한다. 그러기에 자유민주주의는 다원적 민주주의로 등치된다. 진보의 주무기인 만민평등에 대척할 수 있는, 보수의 능력주의에 입각한 민주로 국민적 호응을 얻어야 할 정책개발도 보이지 않는다.
한국의 보수는 비상계엄의 악몽에서 벗어나 통절한 자기성찰로 새 출발을 하여야 한다. 77년 헌정사에서 8번의 비상계엄은 보수의 뼈아픈 유산이다. 잘못을 잘못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이제 국리민복을 위한 성장 엔진을 가동해야 한다. 진보의 포퓰리즘에 맞장구치는 보수는 짝퉁 보수다. 건국과 산업화의 신화를 민주화로 승계하지 못하는 보수는 허구다. 원칙을 망각하고 책임지지 않는 보수에 나라를 맡길 수 없다. 늦었지만 절제와 관용은 진보의 전유물이 아니라 오히려 보수를 재건하는 소중한 가치로 작동해야 한다. 보수의 보수(補修)를 통한 환골탈태만이 국민의 사랑을 받는 보수로 거듭 태어날 수 있다.
출처 :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42909510002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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