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120820530001594?did=NA
파리 드골공항에서 18년…죽어서야 공항 떠난 '알프레드'씨
메흐란 카리미 나세리(Mehran Karimi Nasseri, 1945~ 2022.11.12)는 이름보다 ‘존재’로 기억되는 사람이었다. 프랑스 샤를 드골 국제공항 1청사에서 1988년부터 2006년까지 무려 18년을 지낸, 스티븐 스필버
www.hankookilbo.com
메흐란 카리미 나세리(Mehran Karimi Nasseri, 1945~ 2022.11.12)는 이름보다 ‘존재’로 기억되는 사람이었다. 프랑스 샤를 드골 국제공항 1청사에서 1988년부터 2006년까지 무려 18년을 지냈다.
92년 프랑스 법원으로부터 “난민으로서 적법하게 입국했으므로 강제 추방은 불가하다”는 판결을 받았다. 다만 법원은 그가 “국제법상의 난민 지위 인정서도 비자도 없으므로 공항을 벗어나 프랑스 영토에 발을 들일 수는 없다”고 판결했다. 법원의 저 모순적인 판결로 그의 유폐생활이 시작됐다.
그는 공항의 질서를 따르며 타인의 일상을 존중했고, 공항 직원 및 상점 점원 다수와 친구처럼 지냈다. 공항 당국은 수시로 그의 건강을 보살폈다. 독일항공사 ‘루프트한자’의 한 카운터 직원은 “그는 우리 동료 중 한 명이었고, 우리가 그의 편지를 대신 받아 전달해주곤 했다”고 말했고, 지하 바의 한 매니저는 “그는 공항의 일부였다. 모두가 그를 알았다”고 말했다. 지하층 한 식당 매니저는 “그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는 법이 없었고, 여기서 근무하는 모두가 그를 좋아했다”고 말했다.
그의 일과는 무척 규칙적이었다. 공항이 분주해지는 새벽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인근 화장실이나 직원 샤워실 등에서 몸을 씻고 면도를 했고, 인터뷰 등 특별한 일정이 없는 한 주로 여행자들이 두고 간 책이나 신문 잡지를 읽거나 라디오를 들으며 일과 등을 일기로 기록했고, 공항 상점들이 문을 닫고 환승객들이 잠을 청할 시간이 되면 그도 자신이 정한 거처 즉 2층 라운지 귀퉁이나 지하 쇼핑몰 구석 벤치에 몸을 누였다.
그는 점잖고 품위 있었다. 굶는 한이 있어도 구걸하는 법이 없었고, 공항 직원이나 승무원들이 건네주는 식권이나 식당 할인쿠폰 외에는 일절, 자신의 존엄이 훼손된다고 여길 만한 ‘자선’은 정중히 사양했다.
진실이 뭐였던, 그는 그렇게 스스로 믿고 바라는 바의 자신으로 남고자 했다. 2000년 여름부터 약 1년간 그와 함께 영화를 찍으며, 이란의 가족을 수소문해 만난 미국 영화감독 베르첼러는 “알프레드는 스스로에게 완전히 만족한 듯했다. 그는 기자든 누구든 상대의 기대에 부합하고자 애쓰는 법이 없었고, 어떠한 동정도 원치 않았다. 그의 삶은 오로지 그 자신의 규율에 맞춰 이어졌고, 어떤 의미에서 그는 누구보다 자유로운 사람이었다”고 썼다.
인터뷰 때마다 그는 늘 자신의 처지를 일시적인 것이라고, "언젠가는 공항을 떠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두 달여 뒤 그는 출국장 반대편 문을 통해 공항을 떠났다.
'관심사 >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작가 25일 80세로 별세했다. (0) | 2022.12.26 |
---|---|
'학현학파' 이끈 진보 경제학 거목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 별세 (0) | 2022.12.26 |
한국 첫 추리 문학관 ‘창조적 파괴’ 30년 / 작가 김성종 (0) | 2022.12.09 |
"절과 함께 나도 태워라", 일제 압박에 서슬퍼렇게 맞섰던 한암 스님 (1) | 2022.12.09 |
[펌] 与妻相处之道 by 林语堂 (0) | 2022.1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