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사/시

구겨진 생을 펴다 / 김해자

너럭바위 一石 2025. 1. 25. 22:43

저마다 하루치의 수고를 닫아 건
캄캄한 골목길 오늘도 우성세탁소 안은 환하다
열린 문 사이로 스팀다리미 뿌연 열기 줄지어 승천하고
세탁통은 둥글게 둥글게 돌아가는데
몸에 맞지 않는 옷 덮고 미싱은 구석에서 말없이 존다
문득 다림판 앞에 서서 구겨진 허물
정성껏 펴는 아저씨 얼굴이 성자 같다
그의 등 뒤로 활짝 펴진 생들이 천장 가득 하늘거리는데
무거운 짐을 펴는 그의 등은 누가 펴줄까
하늘을 보니 별빛 몇 모여 세탁소 간판을 걸었구나


『축제』(애지, 2007)

몸이 옷을 입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은 말을 입는 듯합니다. 고맙다는 말, 꼭 다시 오겠다는 말, 종종 생각났다는 말, 늘 응원하고 있다는 말. 이런 말들이라면 보드라운 스웨터를 입은 것처럼 한 시절 따뜻하게 지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모든 말이 나를 감싸주는 것은 아닙니다. 자꾸 간질거리는 말이 있고 어깨가 무거워지는 말도 있고 살을 에는 듯 날카로운 말도 있습니다. 오염된 말은 벗어두어야 합니다. 탈탈 털어내야 합니다. 깨끗하게 빨아서 빛과 바람이 잘 드는 곳에 널어야 합니다. 평평한 곳에 올려 두고 주름과 구김을 편 다음 반듯하게 개어두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새 아침, 우리는 다시 새 말을 입어야 합니다.

박준 시인

출처 :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1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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