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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따라 송해에게 보내는 존경과 연민…송해 평전 펴낸 오민석 교수

너럭바위 一石 2024. 5. 14. 11:54

지난 4월 27일, ‘전국노래자랑’의 국민 MC 송해의 89세 생일에 그의 평전이 나왔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오민석 단국대 영어영문학과 교수가 1년 동안 송해와 동행하며 농밀한 취재와 치밀한 관찰을 통해 세상에 내놓은 결과물이다. 발행 일주일 만에 초판이 매진될 정도로 영원한 ‘송해 오빠’에 대한 관심은 아이돌 못지않다.

 

 

낙원동 사우나에서 마주친 ‘전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서울 인사동의 한 골목길을 걷던 오민석(56) 교수는 우연히 송해와 마주쳤다. 많이 본 어르신인데 이름이 선뜻 생각나지 않았던 그는 “안녕하세요” 한마디만 건넸다. 곧 ‘아차’ 하며 시대의 아이콘 송해임을 떠올렸지만 그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그로부터 2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전국노래자랑’ 외에는 그를 다시 만날 길이 없었다. 오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서른 중반이었던 내가 오십 중후반의 중늙은이가 될 때까지” 말이다. 그런데 어떤 인연이었던 걸까. 어느 날 오 교수는 낙원동의 한 사우나에서 송해와 다시 마주친다. 그것도 벌거벗은 채로.

 

“탕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목욕을 끝내고 옷을 막 걸친 송해 선생님이 제 쪽으로 걸어 나오시는 거예요. 이번에는 다행히 바로 선생님을 알아봤죠. 넙죽 인사를 드리고 마침 갖고 있던, 그 무렵 출간된 제 첫 시집을 얼른 라커에서 꺼내 사인과 전화번호를 적어 선생님께 드렸어요. 저도 사인을 받고 싶어 책을 내밀었더니 뒷면에 당신의 사인과 글쎄, 전화번호를 적어주신 거예요. 깜짝 놀랐죠.”

 

그가 받은 것은 송해가 운영하는 사무실 번호. 전화를 걸었지만 늘 전국 유랑을 다니는 송해와는 연결이 잘 닿지 않을 무렵이었다. 술 약속을 위해 찾은 낙원동 거리에서 또다시 송해와 우연히 마주쳤다. 이쯤 되면 거의 로맨스 영화의 운명적인 남녀 주인공 플롯이다. 그때 이미 송해의 평전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일렁이고 있던 참이었다. 오 교수는 마주친 송해를 놓치지 않고 “선생님 인생에 중요한 사건이 될 수 있는 일이다”라며 따로 만남을 청했다. 그의 눈빛에서 결연한 무언가를 읽었는지 송해도 이 낯선 팬의 청을 뿌리치지 않았다.

 

“후에 알고 보니 그간 평전이나 자서전을 쓰자는 이들이 참 많았는데, 모두 거절하셨대요. 심지어 쓰다가 어그러진 적도 있었고요. 그런데 왜 하자고 하셨는지 그 허락의 이유를 저도 아직 몰라요. 여쭤보면 그냥 허허 웃기만 하시고(웃음). 사실 평전은 인물의 동의를 구하고 쓰지 않아도 돼요. 자료만으로도 쓸 수 있고요. 하지만 저는 살아 있는 송해 선생님의 삶을 또렷이 관찰해서 쓰고 싶었기 때문에 당신의 삶을 좀 보여주십사, 허락을 구한 거죠.”

 

‘전국노래자랑’과 유랑을 시작하다

 

그때가 지난해 봄이었다. 오 교수는 이때부터 겨울까지 송해의 거의 모든 스케줄에 동행하기 시작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노련한 딴따라의 삶을 바로 옆에서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은 작가로서 영광이었고 신나는 일이었다. 매니저 없이 ‘전국노래자랑’ 팀의 버스를 타고 다니는 송해의 옆자리에 앉아 전국 유랑을 시작했다. 이 팀은 주로 1박 2일로 움직였고 날씨가 좋은 봄과 가을에는 거의 매일 스케줄이 꽉 찼다. 송해는 ‘전국노래자랑’ 외에도 각종 쇼, 행사 등으로 늘 바빴고, 오 교수는 역시 그를 따라다녔다. 함께 먹은 밥, 한 숙소에서 잠든 밤 그리고 주고받은 술잔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선생님께 매혹당했다고나 할까. 뵈면 뵐수록 경외심이 들 정도로 자기 관리가 철저한 분이세요. 송해 선생님은 정말 대스타잖아요. 그런데 그 흔한 매니저도 없이, 버스와 지하철을 타거나 걷고, 먹는 것 입는 것도 전혀 가리는 게 없으세요. 전국을 다니다 보면 ‘오늘은 이 지역에서 유명한 걸 먹어보자’ 이럴 법도 한데 일절 그런 욕구를 내비친 적도 없으시고요. 대중교통으로 다니니 팬들이 수시로 몰려드는데 열이면 열, 늘 성심껏 대하시는 것도 참 존경스러웠어요. 이분이 왜 이렇게 오랜 세월 남녀노소 모두에게 깊이 사랑받는지 절감했죠.”

 

가까이서 본 송해는 인정 넘치는 사람이었다. 정이 많으니 그만큼 타인의 고통에 민감했다. 그는 어려운 원로 연예인들을 위해 일부러 종로에 사무실을 운영하고(그들이 나와 쉴 수 있게끔), 그들 중 연고가 없는 이들의 장례까지 손수 치러주곤 했다.

 

“왜 그렇게까지 하시느냐고 했더니 ‘그럼 어쩌겠냐. 지금 이 나이에 버는 사람이 나밖에 없는데 내가 해야지’라고 하시더라고요. 인정도 많고 눈물도 많은 분이세요. 무대를 위해서는 장인에 가까울 정도로 완벽주의자고요. 어떤 숭고함마저 느껴질 정도로. 원리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걸 못 견디시고, 그럴 때는 상대가 누구건 타협도 양보도 없어요. 권위적인 것도 싫어하시고요. 무대를 준비할 때는 누구보다 엄숙하지만 무대 밖에서 사람을 대할 때는 말투며 행동이 얼마나 정겨운지 몰라요.”

멀리서 좋아하던 사람이 알고 보니 더 감동스러운 인물일 때, 그 환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오 교수도 그랬다. 일요일 정오마다 TV를 통해 보던 송해라는 인물은 실제 관계를 맺어보니 브라운관 속에서보다 훨씬 더 감탄스러운 사람이었고, 그 덕에 평전을 위한 취재는 더욱 즐거웠다. 매일 밤 신나게 취재 일기를 써내려갔다. ‘전국노래자랑’이라는 기념비적인 프로그램의 제작 과정을 직접 볼 수 있는 것도 기꺼운 일이었다.

 

“시를 쓰기 위해 지방에서 혼자 칩거하면서 묵객의 시절을 보낸 적이 있는데, 그때도 민박집 거실에서 ‘전국노래자랑’만큼은 꼭 챙겨 볼 정도로 좋아했어요. 대중문화계는 잘난 사람들이 우위를 장악하는 곳이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출연하는 분들은 보통 사람들이에요. 변방 문화에 있는 사람들이 나와서 그 어떤 거리낌 없이 신명 나게 놀거든요. 거기에서 느껴지는 통쾌함을 사랑해요.”

 

기록으로 남겨야 할 시대의 거인

 

송해 평전을 쓰는 과정이 웃음으로만 가득했던 것은 아니다. 평전 취재는 주인공에게 직접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대담과 그의 삶을 옆에서 지켜보는 관찰로 이뤄졌는데, 송해와 오 교수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언제나 둘 다 눈물바람으로 끝나곤 했다. 송해라는 사람의 인생사는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연민의 삶이었고, 눈물 없이 말할 수 없었던 통곡의 삶이었다.

 

대상에 대한 깊은 애정과 거리 두기 사이에서 끝없이 긴장해야 했던 집필 기간을 마친 오민석 교수와 송해. 두 사람의 인연은 이제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오 교수의 카메라에 담긴 송해의 시간들.

 

“저만 울보인 줄 알았는데 선생님은 더한 울보였어요. 특히 어릴 때 헤어진 어머니와 가족 이야기가 나오면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셨어요.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들의 이야기를 할 때도 그랬고요. 선생님의 밑바닥에는 깊은 슬픔이 깔려 있어요. 가슴에 사무치는 그분들 이야기를 할 때면 주변을 개의치 않고 통곡하시곤 했어요.”

 

오 교수는 송해라는 인물이 가진 다양한 면면을 포착했다. 문화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송해는 다층적인 의미를 지닌 시대의 중요한 키워드였다. 올해로 데뷔 60주년을 맞은 송해는 딴따라 1세대이면서 유랑 극단으로 시작해 현재 한국 연예계의 정상에 머물러 있는 한국 대중문화계의 아이콘이다. 그 자체가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뿐만이 아니다. 송해는 개인이기 이전에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횡단한 증인이었다. 오 교수는 “분단 70년의 역사가 그의 몸에 그대로 새겨져 있다”라고 말했다. 송해 선생 삶의 궤적을 들여다보면 그의 말에 수긍이 간다.

 

1927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송해는 해주음악전문학교(현 평양음악대학) 성악과 출신의 엘리트였지만 1·4 후퇴 때 남한으로 건너오면서 어머니를 비롯한 모든 가족과 생이별을 겪었다. 이것은 그의 생애 전반에 깊은 슬픔을 남겼다. 원래 이름은 송복희였지만 배를 타고 피란 오면서 ‘인생이 망망대해 위에 떠 있는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 예명을 송해로 붙였다. 이후 송해는 한국전쟁 때 통신병으로 입대해 군무선 통신 최고 기술자인 766 고속도 통신사(1분에 120자 이상 송신 가능자)에 합격, 한국전쟁의 휴전협정을 알리는 모스 부호를 날린 당사자가 됐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송해라는 저 작고 노회한 육신이 이 역사적인 사건을 모두 겪어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마치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보는 듯하다. 하지만 송해라는 텍스트의 의미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군 생활 중 그는 3군 노래자랑 종합 콩쿠르에 출전하게 되는데, 여기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운명 같은 딴따라의 길로 접어든다.

 

1954년 27세의 나이에 제대한 송해는 이듬해부터 본격적인 악극단 생활을 시작했다. 전국을 떠도는 역마살 팔자가 이때부터 시작됐다. 송해라는 유랑의 역사는 이때부터 근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전국을 돌며 온갖 경험을 쌓은 송해만큼 준비된 연예인이 또 있을까. 1960년대 이후 방송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송해는 마음껏 재능을 펼치게 됐다. 교통방송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가로수를 누비며(1962)’부터 김동건 아나운서와 진행했던 TBC의 ‘힛 게임쇼(1966)’, MBC 개국과 동시에 시작된 ‘웃으면 복이 와요(1969)’, 장수 라디오 프로그램 ‘싱글벙글쇼(1973)’의 초대 MC도 바로 송해다. 그리고 마침내 1988년, 61세의 나이에 운명의 무대, ‘전국노래자랑’의 MC를 맡게 돼 지금까지 굳건히 무대를 지키고 있다.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척박한 한국 대중문화계에 씨앗을 뿌리고 밭을 일궈낸 1세대 연예인인 것이다.

 

울보들의 이야기

 

온갖 풍파를 겪으며 화려한 성공까지 거머쥐었지만 송해에게는 씻어낼 수 없는 깊은 상처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사고로 잃은 아들이다. 연예인의 위상이 달라지며 인생의 상승곡선을 타고 있던 1987년, 그의 나이 60세 때 일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송해의 아들을 트럭이 들이받고 뺑소니를 쳤다. 응급수술을 받았으나 그만 열흘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때 아들의 나이는 만 20세. 오 교수는 평전을 쓰면서 이때가 가장 괴로웠다고 했다. 울기도 많이 울었다.

 

“선생님을 또다시 울리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다른 방송에 나온 이야기를 참고해서 쓰겠다고 했죠. 그런데 선생님께서 눈물을 속으로 꾸역꾸역 삼키면서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어떻게 아들이 사고를 당했고, 이때까지 언론에 공개하지 않았던 얘기까지도요.”

 

또다시 눈물 바람이 됐다. 왜 아니겠는가. 어머니와 생이별한 것도 모자라 어린 아들까지 잃어버리는 비극을 겪었는데. 듣는 오 교수는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아팠고 죄송스러웠다.

 

“뺑소니 친 트럭 운전사를 찾아다니다가 그만두셨다고 해요. 왜냐고 이유를 물었더니 선생님이 ‘트럭을 모는 사람이면 생활이 넉넉지 않을 텐데, 내가 그 사람을 찾으면 그 가족은 또 무슨 수로 생계를 유지하냐’라고….”

 

오 교수는 말문이 막혔다. 송해는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는 “악연은 반복된다는데, 나쁜 일로 그 사람을 또 만나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삶은 아이러니하다. 슬픔에 빠져 허우적대던 그에게 ‘전국노래자랑’을 같이하자는 제의가 온 것이다. 더 이상 슬픔에 잠겨 있지 말고 전국을 떠돌며 ‘야전부대’나 하자는 PD의 거듭된 설득에 결국 수락했다. 그렇게 해서 그를 영광의 자리에 올린 프로그램, ‘전국노래자랑’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그의 나이 61세 때 일이었다.

 

“사람들은 대개 화려한 성공의 자리에 올라 있는 현재의 선생님 모습만 보고 환호를 보내지만, 그 뒤에 숨겨진 고통과 투혼의 세월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특히 ‘전국노래자랑’의 MC가 되기 전까지 지난한 60여 년의 세월은 잘 떠올리지 못하지요. 전쟁을 겪으며 역사의 비극을 경험해야 했고, 딴따라라고 괄시받으며 오늘날 국민 MC가 되기까지 광대로서의 삶도 녹록지 않았어요. 개인적으로는 일찍이 어머니와 헤어지고 아들을 먼저 보내는 뼈에 사무치는 고통도 겪어야 했고요. 외롭고 높고 쓸쓸한 사람, 제가 본 선생님은 그래요.”

 

눈물 어린 툇마루에 손 흔들던 어머니

하늘마저 어두워진 나무리 벌판아

길 떠나는 우리 아들 조심하거라

그 소리 아득하니 벌써 칠십 년

보고 싶고 보고 싶은 우리 엄마여

-‘유랑 청춘’ 송해 8집 앨범 중

 

 

오 교수는 ‘전국노래자랑’ 신재동 단장의 제안을 받아 송해의 데뷔 60주년 선물로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 그가 생애 처음으로 가사를 썼고, 신 단장이 여기에 멜로디를 붙여 완성했다. 어머니와 이별하고 지금까지 전국을 돌며 유랑 생활을 하고 있는 송해의 생애를 담아 쓴 이 곡의 제목은 ‘유랑 청춘’. 송해는 아이처럼 기뻐했고, 노래를 마음에 들어 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잘 모르지만 사실 송해는 현재 무려 8집 앨범까지 낸 가수다. 오 교수는 그의 인생에 작은 위로라도 되고 싶어 노래를 만들었지만 ‘괜히 그를 또 울리는가 싶어’ 두고두고 송구스럽다. 어느 날 갑자기 우연처럼 운명처럼 송해를 만나 예기치 못하게 그의 삶에 뛰어들게 됐지만, 송해와 함께 먹고 자고 웃고 울며 그의 인생을 함께 산 1년의 시간은 오 교수에게도 뜻깊은 경험이었다.

 

“책을 쓰면서 송해라는 매혹적인 대상에 대한 깊은 애정과 거리 두기의 사이에서 끝없이 긴장해야 했어요. 문학평론가이자 대중문화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선생님은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대상이었죠. 우리나라는 아직 대중문화에 대한 인식과 연구가 척박하지만, 「나는 딴따라」는 인간 송해와 저의 교류에 대한 결과물일 뿐 아니라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연구물로 남을 거라고 확신해요. 선생님께서 살아오신 삶은 그만한 가치가 충분하니까요.”

 

취재는 끝났고 책이 출간됐지만 송해와 오 교수는 요즘도 자주 만난다. 그는 “평생 선생님과 만나고 싶다”라고 한다. 강의가 없을 때면 짐을 싸서 ‘전국노래자랑’의 녹화장으로 향하고, 그가 바빠 못 가면 송해에게서 “오 교수, 요즘 왜 이리 뜸해?” 하는 그리움의 전화가 걸려온다. 책으로 엮인 송해와 오 교수의 인연은 아직 마침표가 찍히지 않았고, 어쩌면 이 예리하고 사려 깊은 작가의 펜 끝에서 또 다른 방식의 송해 이야기가 또 탄생할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든다.

 

Profile 오민석 교수는…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이며 현재 단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90년 「한길문학」 창간 기념 신인상에 시가 당선되고,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며 등단, 「기차는 오늘밤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운 명륜 여인숙」, 문학이론서 「정치적 비평의 미래를 위하여」 외에 다수의 번역서와 인물 이야기를 썼다. 현재 단국대학교에서 문학이론, 현대사상, 대중문화론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으며, 2015년 3월 발표된 송해의 신곡 ‘유랑 청춘’의 노랫말을 썼다.

 

출처 :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145/0000013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