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나는 가야사]14. ‘관산성 전투’ 대패로 가야 제국 ‘멸망의 길’
가야 멸망은 전 단계와 1, 2단계가 맞물려 서서히 진행됐다.
멸망의 전 단계는 5세기 후엽 이후 고구려의 침입에서 벗어난 신라와 백제가 동서 가야 권역에 진출한 것이었다. 신라는 먼저 낙동강 동쪽 창녕의 비화가야를 세력권에 넣고 가야 남부로 진출할 기반을 마련했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백제가 510~520년대 대가야 서쪽 권역인 기문(남원) 대사(하동) 등 섬진강 유역을 빼앗아 일본열도로 가는 해상제해권을 장악했다는 점이다. 대가야는 자구책으로 신라와 결혼동맹(522~529)을 맺었다. 그러나 결혼동맹은 7년 만에 ‘변복 사건’으로 파탄에 이르고, 가야 내부의 분열을 부르면서 결국 신라에게 가야 남부 진출의 빌미를 제공해 멸망의 1단계로 이어진다.
가야 멸망의 2단계는 560년을 전후해서 신라의 무력에 의해 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가 멸망한 것이었다. 이때 큰 역사적 사건은 554년 신라와 백제-가야-왜 연합군의 일대 혈전인 관산성 전투였다. 관산성 전투는 ‘포상팔국 전쟁’ ‘고구려 남정’에 이어 가야사를 근본적으로 뒤흔든 세 번째 큰 역사적 사건, 동아시아적 대사건이었다.
백제-가야-왜 연합군은, 갑작스럽게 성왕이 매복에 걸려 죽고, 군사 3만이 전사할 정도로 대패했다. 역사적 승기를 거머쥔 신라는 소가야 아라가야 대가야 순으로 가야 제국을 멸망시키기에 이른다. 562년 대가야의 항쟁은 ‘반란’으로 호명되는 ‘가야반(加耶叛)’이라 불릴 정도로 거칠었다. 신라는 대가야 주축 세력을 고령에서 200㎞나 떨어진 강원도 동해시 추암동으로 추방할 정도였다. 대가야의 함락으로 ‘600년 가야’는 현실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한 것이었다.
가야의 멸망의 결정적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400년 고구려 남정에 의한 금관가야의 타격을 꼽을 수 있다. 김해와 부산의 연합세력인 금관가야가 바야흐로 도약하려는 순간에 큰 좌절을 겪은 것이다. 이는 가야 정치체가 발전할 수 있는 그 기세의 맥이 끊긴 셈이었다. 그 여파로 신라 백제(천도는 했으나 왕통은 이어졌다)와는 다르게 가야 정치체는 정치·문화의 기반을 옮겨야 했고, 힘은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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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산성 전투’ 대패로 가야 제국 ‘멸망의 길’ 접어들다 [깨어나는 가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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