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어람에선가 두 딸과 모처럼 외식을 하는 저녁 큰애한테 니는 결혼 안 하니 하고 파적 삼아 묻자 아빠 철들면, 하고 간결하게 답했고 안 간다는 얘기네, 하고 작은애가 곁에서 거들며 둘이 킥킥거렸다.
몇 해가 흘러 큰애가 결혼을 하겠다고 사윗감을 인사시킨다기에 나 아직 철 안들었는데? 했더니 그니까, 기다리단 안 될 것 같아서, 하며 지들끼리 또 웃었다.
그애가 결혼을 해 딸을 낳았다. 졸지에 할아버지가 된 것이다. 가끔 보는 해맑은 어린것이 나에게 리액션이 여간 좋은 게 아닌데 큰애가 여봐 여봐 좋아한다 좋아한다, 하고 반기니 둘째가 거들기를 얘는 할아버지 철든 다음에 태어났잖아, 그러며 또 지들끼리 히히거렸다.
시인 박철 열한번째 시집 '대지의 있는 힘' 출간
올해로 시력 서른일곱해째를 맞은 시인 박철의 열한번째 시집 ‘대지의 있는 힘’이 문학동네시인선 220번으로 출간됐다.
박철 (朴哲, 1960년 1월 27일 ~ )은 척박한 사회현실을 시인의 삶의 토양이었던 ‘김포’라는 무대로 형상화한 ‘김포행 막차’(창비, 1990), 주류에서 밀려난 주변부 사람들의 이야기를 희망의 언어로 노래한 ‘영진 설비 돈 갖다 주기’(문학동네, 2001),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를 고민케 함으로써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황현산으로 하여금 “박철을 치열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치열함을 배반하는 꼴이 될 것이다”라는 찬사를 불러일으킨 ‘불을 지펴야겠다’(문학동네, 2009), 부조리한 세계와 생활의 비참 속에서도 사랑의 모습을 발견하는 시선이 돋보인 ‘없는 영원에도 끝은 있으니’(창비, 2018) 등을 펴내며 시단에 그 이름을 굳건히 각인해왔다.
그간 꾸준한 시쓰기로 열 권의 시집을 발표해온 시인은 ‘불을 지펴야겠다’로 천상병시문학상과 백석문학상을, ‘없는 영원에도 끝은 있으니’로 노작문학상과 이육사시문학상을 각각 동시 수상하는 값진 쾌거를 이뤘다.
‘대지의 있는 힘’은 그러한 시인이 ‘모색과 실험’을 통해 ‘확실한 변화’를 도모한 시집이다.
1부 ‘대지에, 대지를 향하여, 대지를 이루고’가 삶이라는 대지를 일구는 이들에게 보내는 뜨거운 응원을 들려주고 있다면, 2부 ‘고운 눈에게는 고운 눈의 삶을 돌려준다’는 우리네 소박한 일상 속에서 사랑을 길어올리는 눈빛을 그리고 있다.
박철을 가리켜 시인 박형준은 “우리 시대 사람살이와 가장 닮은 시어로 시를 쓰는 시인”이라 칭한 바 있다. 「가을의 전설」은 그처럼 시인이 담백한 언어로 읽는 이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시이다. “강 건너만 보아도 아득”해지는 “나이”가 된 시인은 “오랜 친구”에게 “사랑 얘기도 듣고” 또 “많은 것을 보”며 “무언가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사랑하는 동안 살아가는 동안”(「시」)에 주변과 이웃에게, 그리고 자연에 “뭐라도 내주고 싶”고, 아직도 세상을 “조금 더 사랑”하고 싶다고 고백하는 시인의 목소리는 깊은 여운을 남긴다. 또한 여전히 삶을 “처음 가는 길인 양” 대하는 시인의 열린 마음은, 관계를 사람과 사람 사이에만 국한하지 않고 개체와 개체 간으로 확장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시인은 “개는 개이고 나는 나일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문득 고요한 관조 속에서 개 또한 시인 자신처럼 저만의 “사려[道]”와 “말[氣]”을 지녔다는 것을 깨닫는다. 개를 통해 시인은 제 안의 외로움을 떠올리고, “한나절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이 스쳐가는 관계를 운명적인 마주침으로 의미화해냄으로써 우리 주변부를 새로운 눈으로 다시금 둘러보게 한다.
3부 ‘지금이야말로 시를 쓸 때다’는 시쓰기에 대한 시인의 마음가짐을 다룬 시들을 통해 박철 시세계의 변화를 감지하게 한다.
작가는 와글거리는 질주의 소음 속에서 정적과 침묵, 고독의 공간을 완강하게 지켜냅니다. 운명처럼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 공간에서 작가는 부박한 세태 속에 빠르게 잊혀가는 소중한 의미들, 아름다운 것들을 성찰하고 그것들을 망각에서 구해서 눈에 보이게 뚜렷하게 재현해내는 일을 해야 하겠지요. (…) 그래서 나의 친구 시인 박철은 이렇게 노래한 것 아닐까요?
시인과 사십여 년의 우정을 쌓아온 망년우(忘年友) 소설가 현기영은 ‘우정 에세이’에서 “지금이야말로 시를 쓸 때다”라며 시인의 “과거와 미래 사이의 현재”(「다리」)를 북돋는다. 그 응원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다.
출처 : 경북일보(https://www.kyongbu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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